유리난간


유리난간

우리 집도 대구 정육점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를 왔다.

1978년 한양대에서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데 딱딱 맞아 떨어졌다.

“이 자슥아. 오두방정 떨지 마라. 팀이 졌는데 즐겁더나. 니는 좀 맞아야겠다.

야구의 전설인 장훈 선배가 최연소자라며 나에게 야구방망이와 글러브 등을 선물해 준 게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1977년 드디어 대구상고가 인천 동산고를 상대로 결승전을 치러 청룡기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조용기 목사라는 분이 설교를 하는데 말이 따발총처럼 빨랐다.

역시 우리 아들. 이래 할 줄 믿었다.

꿈같은 대학생활이 시작됐지만 문제는 여자친구 하나 없었다는 것이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한강다리를 넘어 장안동까지 뛰어가면 1시간이 걸렸다.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왼쪽 두 번째)이 1980년 아내 이신화씨(왼쪽 세 번째)와 함께 강원도 춘천 남이섬에서 한양대 야구부원들과 모임을 갖고 있다.

” “어머, 안녕하세요.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이신화라고 가 해요.” 미소가 아름다웠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행복했다.

“안…녕…하세요. 지는 이만수라고 합…니다.

TV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다들 라디오로 고교 야구경기를 청취했다.

” 누구보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셨다.

‘저렇게 청순하고 예쁜 대학생이 여자친구라면 소원이 없겠다.

신화씨는 7남매 중 막내였다.

어머니의 조언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팡, 팡, 팡.’ “이 노무 자슥아. 잠 좀 자자. 니 누꼬.” “네, 이만숩니더.” “어, 그래? 잠 좀 자고 가 하그라.” 고교 2학년 때도 성적이 최고였다.

그렇게 첫사랑과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됐다.

” “그럼 더 이상 우리 만남은 계속될 수 없어요.” “머라꼬?” 울며 겨자 먹기로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갔다.

우리 집은 서울 둔촌동 주공아파트였다.

“장하다.

“형, 그 누나 남자친구 없대.” “진짜가.” “응.” 남동생의 소개로 소개팅 자리에 나갔다.

눈이 올 때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녀가 손을 쬐면 나는 스윙연습을 했다.

“만수씨, 저랑 사귀려면 조건이 하나 있어요.” “먼데?” “교회에 나가야 해요.” “에이, 그럴 시간 있으면 연습을 한 시간이라도 더 하겠다.

지프를 타고 가 동대구역부터 시내 한 바퀴를 돌아 학교로 왔다.

그렇게 1시간 동안 데이트를 하고 다시 둔촌동까지 뛰어왔다.

말뚝을 세우고 하루에 버스 타이어를 300번씩 쳤다.

교회라는 곳은 무척 신기했다.

신화씨의 집은 장안동이었다.

태어나 처음 출전한 고교 야구대회에서 홈런을 치고 나니 맞아도 기분이 좋았다.

전교생이 나와 환영을 해줬다.

대학 3학년 때였다.

고교 3학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에 발탁돼 일본 가고시마에 가서 대표팀 연습에 참여했다.

학교로 팬레터가 쇄도했지만 아버지가 교장선생님께 신신당부해놓아서 모두 소각했다고 한다.

[역경의 열매]  이만수 4 청룡기 대회서 홈런 한방… 일약 스타로 기사의 사진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얼굴은 모르지만 ‘대구상고 이만수’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대학 진학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청룡기 대회에서 홈런은 쳤지만 대구상고는 그만 1회전에서 탈락하고 가 말았다.

꽃피는 4월 축제 때 3일 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야야, 니는 어떻게 여자 하나 없이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노. 응?” 어느 날 고 가 등학교 1년 선배이지만 나이는 나와 같은 김시진 선수가 단아하게 생긴 여대생을 데리고 왔다.

밤에 연습할 때는 불빛이 없으니 전봇대 밑에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청룡기 대회 사상 처음으로 고교 1학년짜리가 홈런을 쳤으니 일약 유명스타가 됐다.

’ 그해 10월 19일이었다.

” 그날도 선배들의 몽둥이 찜질이 있었다.

신화씨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백인천 선배도 봤다.

빨리 고교를 졸업하고 제과점에서 여학생들과 빵을 먹는 게 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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